<그리운 나라, 박정희>고아 11명 함께모여 사는 ´기러기집´
사연 듣고 비서관 보내 보금자리 내줘…실화 바탕 영화화도
2008-06-12 13:26:59
한국인이 지난 20세기에 무엇을 했는가를 물을 때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푸른 숲이다. 박정희 시대에 산림녹화를 독하게 추진해 헐벗은 산야의 97%를 푸른 숲으로 덮었다. 나무가 많은 나라는 잘살고 국토가 헐벗은 나라는 못사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국토를 푸른 숲으로 덮어가면서 국가의 가난을 벗겨냈지만, 그러나 오랜 가난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렵고 버거웠던 것이 전쟁과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고아와 기아(棄兒)들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산림녹화처럼 확실하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가 없어 그 어린 생명들을 국내에서조차 거두지 못해 해외입양이라는 이름의 ‘고아 수출’을 했다.
서울을 떠난 비행기가 먼바다를 건너는 구만리 상공에서 끝없이 울어대는 어린 생명들,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품에 안고 진땀을 흘리며 안타깝게 달래고 달래어도 누구도 그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없었던 그 어린 생명들의 해외입양은 바로 한국의 어두운 현실이고 아픔이었다.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들이 동냥을 다니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그 시절에 고아와 기아들은 오죽하겠는가. 깡통을 든 거지 아이들이 이집 저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고 골목에 넋을 잃고 주저앉은 모습은 허구한날 눈으로 보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잠이 든 거지들이 채 잠이 깨기도 전인 지난 주 어느날 새벽 3시30분 탱크들이 잠든 서울에 진입하였다.”
뉴스위크지(1961년 5월29일)가 보도한 5.16의 새벽 광경이다.
5.16은 대책없는 빈곤과 허무주의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그해 1961년 11월 박정희가 미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 마침 해외 순회공연 중이던 선명회합창단(현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이 시애틀공항에서 애국가 합창으로 그를 처음 맞이했었다. 그 선명회합창단이 바로 전쟁 고아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등 외국의 TV에 비치는 한국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들과 구호양곡을 배급하는 장면들 일색이었다.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963년 겨울에도, 한 신문은 그해에도 고아와 기아가 부쩍 늘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싣고, 서울의 시립영아원에 맡겨진 갓난아기들 중에 가난 때문에 버림받는 아기가 7할쯤 된다며 “통금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밤이면 버린 어버이와 버림받은 아기가 함께 운다”고 당시 한국 사회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조선일보 1963년 12월 20일)
그 모진 세월을 맨몸으로 뒹굴며 살아온 한 젊은이가 있었다.
김영환. 11세 때에 서울에서 6.25를 만나 혼란의 와중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길거리에서 밥을 얻어먹어야 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험한 세파(世波)를 홀로 헤쳐온 그는 1957년 17세 때에 해병대 제69기로 입대해 1960년에 제대했고, 그리고 고독한 방황 끝에 홀로서기의 인연을 맺은 곳이 뚝섬이었다. 뚝섬에서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고 1종면허증도 취득해 뚝섬을 오가는 버스 운전사가 된 것이 1963년이었다.
버스를 운전하노라니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이 늘 눈에 밟혔다. 그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배가 고픈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아이들이 지난날의 바로 자기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뚝섬 종점에 돌아오면 통행금지 시간이 됐는데도 갈 곳이 없어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거지 아이들이고,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어느날은 6살짜리 아이가 몹시 울길래 왜 그런가를 물어보니 외할아버지가 자기만 버스에 태우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집을 찾아갈 수도 없는 곳으로 멀리 아이를 혼자 보낸 것이다. 아이를 버린 것이다.
그 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혼자 살던 움막 같은 곳에 아이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 것이 1969년, 그때부터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다 보니 몇년만에 11명으로 늘었다.
이웃 사람들은 그 집을 ‘기러기집’이라 했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부르며 날아갑니다.
엄마가 그리운 아이들의 기러기 가족이 사는 집이다.
기러기 아빠 김영환의 고민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움막이나 천막을 짓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아이들과 함께 기거할 ‘붙박이 집’이 없었다. 운전사 수입으로는 생계 유지에 급급해 집 장만은 꿈 속의 그림일 뿐이었다. 이리저리 밀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1973년 4월에 그나마 자리를 잡은 곳이 강남구 도곡동의 허허벌판이었다. 거기는 쫓겨나지 않을 것 같은 곳이라 비닐하우스 움막을 짓고 두 다리 뻗고 잘 수가 있었다.
이듬해에는 한 젊은 여성이 찾아와 자원봉사를 해주기 시작했다. 자원봉사 여성은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아이들의 밥과 빨래를 해주고 목욕시키는 일뿐 아니라 공부까지 가르쳐 주어서 기러기 아빠의 일손을 크게 덜어주었다.
김영환은 1976년 11명의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부터는 35세의 노총각 김영환도 어엿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천사 같은 자원봉사 여성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김영환은 아이들을 위해 생업에 더욱 열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그들의 무허가 집이 도시계획에 의해 헐리게 된 것이다.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어 기러기집이 옮겨갈 곳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어깨가 축 늘어졌고, 구청 사람들이 나오면 불안에 떨며 아빠의 표정만 바라보았다. 철거반이 언제 갑자기 들이닥쳐 그들의 보금자리를 헐어버릴지 몰랐다.
김영환은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생각 끝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와대에 편지를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번 호소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얼마 후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고 기러기 가족의 사정을 확인하더니 김영환에게 말했다.
“정부가 해야 할 어려운 일을 하시는 분께 감사 드립니다. 도와드릴 테니 용기를 잃지 말고 사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김영환은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아빠의 생일상을 차려주었을 때 울고 두번째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마도 국가 지도자에게는 경제성장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 어두워 보이게 마련인 그림자를 지우는 일이 거창한 국가건설 프로젝트 못지않게 어려울 것이었다.
1975년 연초의 대통령 동정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오전 보사부를 연두순시, 고재필 장관으로부터 올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박대통령은 또 고아들의 해외입양 문제에 대해 이들을 무작정 해외에 입양시키는 것보다 이들을 고아원에서 키우되 독지가들과 관련을 맺어 자립할 수 있는 연령까지의 양육비 및 교육비를 염출하는 방안 등을 검토, 원칙적으로 이들의 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토록 하라고 지시했다.”(조선일보 1975년 2월18일)
대통령 박정희는 자존심이 강했다. 잘살아야겠다고 경제정책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가난했던 시절 외국에게 얻어먹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며, 국가의 체면을 중시해 외국을 방문할 때면 수행원과 수행 기자들에게도 항상 분수에 맞지 않는 쇼핑이나 눈밖에 나는 처신을 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런 박정희에게 고아의 해외입양은 여간 부끄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해마다 연말이면 비서관을 시켜 신체장애인, 무의탁 노인, 고아들에게 떡, 과일, 고기 등을 보내는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의미 외에도 복지(福祉)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한 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김영환의 기러기 가족을 모른 체할 리가 없었다.
기러기집에 청와대 비서관이 다녀간 뒤 구청에서 통고서가 날아왔다.
“귀하에게 시유지 사용을 허가함. 집을 지어 이사하시오.”
으르렁거리던 구청 사람들의 태도가 언제 그랬는가 싶게 달라졌다.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김영환을 차에 태우고 집을 지을 후보지 세곳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역삼1동 643번지의 체비지 38평이 기러기 가족의 집터로 결정되었다. 구청 사람들은 빨리 집을 지어 이사하라고 했다.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쪽에서 서둘러댔다.
그랬는데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79년 10월.
“얘들아, 대통령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기러기 가족은 목놓아 울었다. 국장(國葬) 때에 광화문에 나가 또 울었다.
어둡고 무정한 나날이 흐른 뒤 이듬해 1980년 11월 기러기 가족은 별세한 대통령의 지시로 마련된 역삼동 야산 중턱 체비지에 18평짜리 블록 벽돌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택시 운전을 하기로 하고 버스회사에서 받은 퇴직금과 자원봉사 여성의 도움으로 마련된 보금자리였다.
블록 벽돌집이 완성되니 그것도 준공식이라고 TV방송국에서 나오고 유명 코미디언과 집을 짓는 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준공 테이프를 끊어주었다. 그들이 TV에 얼굴을 비치고 사라진 뒤끝은 허전했다. 기러기 가족이 그 집을 보여주고 싶고, 또 그 집을 보고 진정 기뻐할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후 기러기집의 이야기는 1987년 ‘기러기 가족’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나왔고, 김영환은 66세가 되던 2006년에 자서전 ‘기러기 아빠’를 썼다.
그의 삶에서 아이들 외에 또 다른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자원봉사 여성이었다. 기러기 둥지로 날아든 그 천사는 목사의 따님이며 대전보육대학을 졸업한 김천순. 기러기집을 지었을 때 김영환과 결혼해 기러기 엄마가 된 그녀는 1남1녀를 낳아 13남매의 가족에게 모닥불 같은 사랑을 남기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올망졸망했던 아이들이 기러기 엄마의 보살핌으로 의젓한 처녀 총각으로 컸고, 그들이 모두 시집 장가를 간 뒤 무심한 세월의 풍상이 스쳐간 역삼동 기러기집에 홀로 남은 김영환의 곁에는 자서전 ‘기러기 아빠’만이 놓여 있었다.
기러기 아빠 김영환의 삶은 영화 ‘아름다운 비행(Fly Away Home)’의 한국판 같은 것이었다. 개발업자에게 밀려 떠나야 하고 추위가 오기 전에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야 하는, 엄마가 없이 태어난 기러기들에게 날갯짓을 가르쳐 떠나보내는, 기러기 편대의 맨앞에 선 ‘아름다운 비행’의 주인공이 또 있었던 것이다.
노후의 김영환은 기쁘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는 두곳이 있다고 했다. 부인이 잠든 경기도 파주의 금촌공원묘지와 그리고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소라고 한다.
김영환은 전쟁 고아였다. 그가 길러서 보낸 아이들도 기러기였고, 그 자신도 기러기였다. 그러고 보면 기러기집을 짓게 해준 대통령 박정희도 기러기 아빠인 셈이었다.
[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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